이런저런~~/나의 언어

또 하나의 소통

Jeeum 2021. 10. 19. 20:50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다. 공공의 물건이므로 내 맘대로 하면 안 된다. 자신의 책은 물론 도서관에서 빌린 책조차도 함부로 접지 않는 조카를 둔 고모여서 은근히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은 다루기가 조심스럽다. 따끈따끈한 신간이면 더욱 그렇다. 조심조심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카에게 혼난다.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을 자주 만난다. 좋은 문장을 만나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좋은 사람과는 가까이 있고 싶어 지고, 자주 보고 만지고 싶어지는 것처럼 책에서 만난 문장에 마음이 가면 같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 표시를 하고 싶어 진다. 내 책이라면 맘대로 줄을 긋기도 하고, 생각나는 대로 메모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기도 한다. 연하게 연필로 줄을 그었다. 옆에 있던 조카가 펄쩍 뛴다. 이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다가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화를 핑계로 아예 책을 사버리기도 한다.

 

나는 조카와는 다르다. 책을 읽다 만나는 줄이나 메모, 표시가 무지 반갑다. 마치 새로운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든다. 모르는 누군가의 흔적이 신선하다. 누군가 그어놓은 문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다.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장에 머물면서 다시 주의를 기울여 읽기도 하고, 이 문장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줄을 긋게 했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은 지점에 있을 때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설렌다. 그래서 그 줄 아래 느낌을 보태고 싶어 진다. 하지만 책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조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한다. 그럴 때 독서는 피곤하다.

 

가끔 소통을 생각한다. 나는 언어치료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이나 의사소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장애로 인한 언어적 소통의 부재는 어린아이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고 성장을 방해한다. 언어치료사의 역할은 아이의 언어적 소통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학습하는 과정이나 언어를 성장시키는 일은 장애 아동에게 가끔 힘겨운 일이 되기도 한다. 아직 어린데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간혹.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있어 언어를 사용한 소통의 욕구는 엄청나게 본능적인 것이다. 누구라도 소통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코로나19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경험적 지식이다. 사회적 소통의 기회가 박탈되면서 코로나 블루로 힘들어하는 우리가 그 증거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남겨진 타인의 흔적이 내게는 소통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다가온다. 웃으며 다가왔는지, 울면서 다가오는지, 아니면 고통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남겨놓은 흔적에서 나는 소통의 의미를 찾는다. 작은 사색을 해 볼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지만 오로지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인연 하나로 연결되고 소통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다시 책을 본다. 그리고 잠시 멈추게 되는 낱말, 문장에 몰래 살짝 흔적을 남겨본다. 내가 남겨놓은 흔적을 누군가 발견해주면 좋겠다. 그 흔적이 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짧은 줄이 끝나는 지점에 그가 소박한 메모 하나 남겨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상상을 해본다. 일부러 흔적을 남겨두고 싶다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 책을 빌려 보고 거기에 누군가 덧붙여 놓은 얘기가 남아있는 기분 좋은 상상을. 이것도 내가 도서관의 책을 읽는 이유이고, 남몰래 가끔 흔적을 남기는 이유이다.

'이런저런~~ > 나의 언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월의 멋진 날  (0) 2021.10.27
제주 올레 DDG, 내게 쓰는 편지  (0) 2021.10.20
아침 독서를 하다......  (0) 2021.04.21
숙제  (0) 2021.04.07
어머니  (0) 2021.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