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2021). 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편혜영의 새소설. 어떤 문장이 들어있을까? 어떤 얘기가 기다릴까? 약간 두근두근 설렌다. 중세의 집인 듯한데 감옥 같은 작은 창 하나뿐이다. 답답해지는 얘기인가? 읽는 동안 행복했으면 싶은데.
술술 읽어나간다. 술술 흘러간다. 사람의 일상에서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 얘기를 만드는 작가들의 예리한 관찰, 시선이 늘 놀랍다. 아픈 이들이 얘기가 계속된다. 술술 읽지만 술술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문장들이 남는다.
"그 순간 무영은 깨달았다. 자신은 수오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수오가 평소 마음을 터놓는 친구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도 아니었다. (중략) "갠 운이 좋아. 너도 알잖아. 별일 없을거야." 운이 좋다는 말, 무성의했지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기도 했다. (105쪽, 리코더)
"남편이 사라진 후 미조는 잠을 자지 못했다. 견디다못해 어느 날인가 오래전에 선물로 받아둔 술을 조금 마셔보았다. 몸이 느슨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금 더 마시니 모든 문제가 치매 탓으로 여겨졌다. 남편은 순전히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헤매다가 종내는 스스로를 잃게 되는 일도 있으니까."(134쪽, 플리즈 콜미)
사실 단편은 좀 지루하다. 내가 너무 사건과 사연에 물들고 무디어져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단편소설 읽기는 좋은 공부이다. 사람 혹은 인생을 공부하기엔 참 좋은 교재이다. 인물을 생각하고 인물의 삶을 느끼고 그 입장에 서서 나라면 어떨까 생각하다 보면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싶다가 종국에는 내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나를 들여다보게 만들어 준다. 이것이 단편 소설이다.
책을 읽다가 숨겨진 내 맘을 들키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 책을 언제 읽느냐에 따라 오래 남기도 하고, 스쳐 지나기도한다. 난데없이 이런 문장에 눈이 머무른다. 눈이 머무른다는 것은 맘에 걸렸다는 의미이다.
"미래는 본 적이 없어서 상상하기 어려웠다."(208쪽, 미래의 끝)
"~~ 같은 사무실에 모여 공동의 업무를 하며 시간과 경력과 우정을 쌓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한지역의 공사가 끝나면 각기 다른 현장으로 흩어졌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더라도 사정이 생겨 며칠 못 나오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시 만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204쪽, 미래의 끝)
문장을 이루는 주된 구성요소가 낱말이다. 낱말에는 비범함이라거나 특별함이 없다. 자주 사용될수록 우리의 삶과 밀접하다는 의미일뿐. 그 낱말의 일상성이 커지면 쉽게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기 쉽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낱말이 훅 다가온다. 오늘 아침은 '함께'이다. 이 낱말이 자꾸 눈에 걸린다. "함께" , "공연히", "겨우" 그리고 "역시"
'부사'는 중요하다.
함께한 이년 동안 동무가 될 씨앗이 뿌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2년은 3주면 문을 닫을 수 있는 딱 고 정도의 무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치 목적적으로 이루어진 한편의 공사현장이었던 것을. 그저 주캐를 위한 부캐였던 것을. 최소한 두 개의 주캐라는 마음만 가져주길 바랬었는데.
"아줌마는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거라고 했지만 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자 여러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 미래는 바닥나버렸다. 아줌마와 처음으로 우리집이 아닌 곳에서 헤어졌다. 아줌마는 우리와 반대쪽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아줌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무릎을 구부리고 내게 눈을 맞춘 후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주먹을 꽥 쥐었다. 무엇이든 참고 싶어 졌다."(221쪽, 미래의 끝)
이미 반대쪽으로 갈 것이 정해졌다. 함께한 시간을 건너 이별의 순간이 찾아올 때, 비록 서로 반대편 버스를 타야 한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무릎을 구부리고 눈을 마주칠 정도의 마음이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하하하" 웃음소리의 파장이 너무 컸다. 이 모두 내 맘이 시킨 잘못된 매핑이라 할지라도 이미 지도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단편이 너무 단편이어서 지루하다 생각했다. 읽기 시작했으니 그저 끝까지 읽어야지 생각했을 뿐이다. '편혜영'의 문장이니까.
결국 마지막 단편 '미래의 끝'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작가는 말했다. "동네에 다국적 체인의 호텔이 있는데, 지나갈 때 마다 닫힌 창문을 쳐다보게 된다. 창문은 언제나 무엇인가 내보이지만, 호텔 창문은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면 보여줄 것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이다. 어째튼 나는 지금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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