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종일 논문을 쓰느라 보냈다. 부끄럽지만 오랜만의 작업이다. 나름 몰입할 수 있어 좋았다. 이런 느낌이 좋아 공부하기를 선택했던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내가 대견하다. 하. 지. 만 기분이 좋으면 몸도 가뿐해야 하는데 잠을 설쳐서인지 온몸이 너덜너덜 피곤하다. 며칠을 새도 거뜬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맘 놓고 공부도 못한다. 슬프다.
밭으로 갔다. 언니가 시금치와 당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피곤도 풀겸 바람도 쐴 겸. 밭에는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을 돌보고 있었다. 다들 배추를 묶어주고 있었다. 나도 안 할 도리가 없다.
세어봤다. 내 텃밭에 배추가 모두 26포기이다. 조금 작은 것은 두 포기 뽑아 두었다. 토실토실한 무도 2개 뽑았다. 우리하나 언니 하나. 그리고 나머지 모두 묶어주었다. 김장용 배추는 이렇게 묶어주면 속이 더 꽉 찬다고 한다. 노랗게 맛있게 익어갈 것이다. 꽉 찬 배추는 모두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것이다.
배추를 골드빛 리본으로 묶어주니 헝크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거울을 보는 듯하다. 오늘 밤에는 이 아이들은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머리를 한 채 나란히 나란히 도란도란 이웃이 되어 얘기를 주고받을지도 모른다.
당근은 언제나 보는 재미 캐는 재미가 좋다. 초록초록 풍성한 이파리 끝에 달린 귤빛 당근. 땅 속에 단단히 박혀있던 것을 살살 흔들어 뽑으면 요렇게 흙이 묻어있어도 너무너무 이쁘다. 콱 깨물어주고 싶다. 정말 이쁘다. 이쁜 것은 맛도 좋다. 누구라도 와서 얼마든지 뽑아가도 좋다. 내일 아침, 나의 생일날 아침에는 사과와 당근을 함께 갈아 마시고 건강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텃밭 주변의 밭을 정리한다. 깨끗하고 단정한 밭이 보기도 좋다. 근데 나는 그렇게 잘 하진 못한다. 울타리에 삶을 마친 여주가 말라붙어 있다. 덩쿨이 엄청나게 길어 한번에 정리하기 어렵다. 반쯤 정리했다. 다음 주 학회를 마치고 일요일에 와서 마저 정리해야겠다.
집에 와서 꺼내 놓으니 이렇게 풍성하다. 시금치에 부추, 당근, 배추에 무까지. 배추 된장국을 끓여야지 했는데 이미 언니가 미역국에 반찬까지 냉장고에 넣어두고 갔다. 감사하다. 자연이 주는 선물만으로 이미 맘은 그득한데 가족들의 마음까지 내 맘이 좁아 들어갈 틈도 없이 꽉 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