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나의 언어

쇼핑의 이유

Jeeum 2021. 12. 9. 22:00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고모, 혹시 백화점 갈 일 없어?" "없는데." "백화점 가본 지 오래야. 갈 일이 크게 없네." 눈치도 코치도 없는 고모의 대답이었다. 조카도 쉽게 꺼낸 말이 아닐 텐데 말이다. 조심스럽게 걸어온 말의 숨은 의도를 전혀 읽지 못했다.

 

조카는 서울에서 하는 미대 졸업반 친구의 작품 전시회에 초대를 받았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인당 초청 가능한 사람 수가 제한되어 있는데 자기를 초대해 주었다고 기뻐했다. 친구에게 축하해 주고픈 마음과 서울에 가고 싶은 욕망이 은근하게 결합하여 간만의 서울행에 다소 들떠있었다. 지난겨울, 졸업 유예를 하고 집으로 내려온 조카는 취업 준비를 위해 서울로 되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서울 지역의 코로나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 조금씩 망설이는 사이 그저 시간만 흘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초대를 받았으니 모처럼의 상경에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백화점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입고 갈 옷 때문이었다. 얼마나 스스로를 표현하고, 예쁘고 싶을 나이인가? 거기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일테니 나름 꾸미고 싶은 욕심도 생겼던 것이다. 

 

어째튼 눈치 없는 고모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다. 겨울 파커를 사려했지만 이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가장 먼저 맘에 든 것은 슈트였다. 내가 보기에도 이뻤다. 여기저기 윈도쇼핑을 하고 시착도 했다. 일요일의 백화점은 코로나 때문인지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쇼핑하기 딱 좋았다. 백화점 산책에 지쳐 달콤한 도넛과 커피를 먹었다. 힘을 얻어 눈여겨봐 둔 겨울 파커를 사러 가려했더니 슈트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입어보니 따뜻하고, 이쁘고, 화사하기까지 하다.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았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맘에 들면 사자고 했다. 순순히 샀다. 돈은 고모가 내는 것이니까. 고모 찬스.

 

다시 파커 매장에 갔더니 사람이 많아졌다. 찜해두었던 파커를 다시 입어 보았다. 괜찮아 보였지만 숨어있던 새로운 디자인의 파커를 다시 발견했다. 훨씬 좋아 보였다. 베스트셀러였다. 원하는 색깔도 사이즈도 없었다. 즉시 주문해도 이달 말에 온단다. 실망하는 조카. 그제야 말한다. 서울 갈 땐 못 입는다고. ㅠㅠㅠ

 

아하!! 옷이 필요했던 이유를 그제야 제대로 알았다. 조카 덕분에 나도 하나 샀다. TV에서 보고 사려했던 비싼 파커를 샀다. 내가 입어도 좋은 것을 조카가 입으니 더욱 어울린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 서울 갈 때 고모 파커 입고 가라고 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표정도 밝아졌다. 본인이 원했던 브랜드의 파커를 분주하게 검색했지만 백화점에 없는 게 인터넷에 있을 리 없었다. 언제 재입고될지 모른다는 장문의 문자만 받았다고 했다. 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사 년 동안 대학생활을 한 서울에 학교 친구도 지인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겠지만 직접 만나는 것도 오랜만일 텐데. 들뜬 마음이야 오죽할까.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백수(?)의 웅크린 마음은 모처럼만의 외출을 핑계로 고모 찬스를 이용해 이쁘고 화사하게 단장하고 싶었던 것이 쇼핑을 하러 가자고 한 이유였던 것이다. 어린 그 마음에서 지난날의 내가 보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휴학하고 되돌아가지 못했던 대학. 진로에 방황했던 스무 살의 그 겨울. 친구들은 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쉽게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돈'이 없어 같이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는 사실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위축시켰던가. 거리마다 나부끼는 연말의 흥겨움은 또 얼마나 나를 외롭게 했던가. 내가 입고 다니던 낡은 옷과 신발이 얼마나 춥고 초라했던가.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쪼그라들었었다. 

 

한번 위축된 마음은 열등감이 되었고, 낮은 자존감이 되었다. 잘 웃지 않는 청춘이 되었다. 고집스레 외길로만 나가려고 했다. 타협하지 못했다. 조금만 벗어나도 잘못될까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오로지 안으로만 파고들어 공부에 매달렸을 뿐이었다. 마음의 구멍이 다시 메꾸어질 때까지 나에게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했다. 편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해보고 싶은 것이 많던 시절에 대책도 없이 궁핍했던 경험은 마음의 구멍을 만들고 그걸 채우느라 주위에는 눈도 안 돌리는 외골수가 되었다. 직장을 잡고, 수입이 안정되고, 나이를 먹고, 수많은 경험치가 쌓인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열릴 수 있었던 마음의 문. 그 시작이 친구들과 비교되었던 초라한 나의 옷차림이었던 것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제 나이를 먹고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 까지 느낄 일도 아니었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래서 지금  조카가 친구들 앞에 입성마저 단단하게 입고 가길 원하는 얄팍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부모도 아닌 내가 굳이 조카에게 그렇게 까지 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말해주고 싶다. 내 조카가 아니라도 그 어떤 청춘이라도 친구들과 비교되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외롭고, 초라해지고, 열등감이 느껴진다면 기꺼이 낯선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고. 그 어두운 골목길에서 나처럼 오랜 시간 동안 힘들지 않게, 아프지 않게, 손잡아 줄 수 있는 어른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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