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9일, 11시 금년 마지막 제주 여행을 시작했다. 일요일 늦은 아침에 출발하는 여행은 매우 낯설고 어색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몸에 익은 거품 가득 커피 한잔을 습관처럼 마시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바닥을 끄는 요란한 소리가 겨울 공기의 무거운 흐름을 갈라놓았다.
비행기가 몹시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퍼지는 사람들의 낮은 음성에서 불안함이 퍼져 나왔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커다란 몸을 한 남성이 뒷사람(시윤)을 생각지 않고 의자를 제쳐(어쩌면 큰 일은 아니지만) 깜짝 놀랐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정성껏 자신의 머리카락을 털기까지....(눈에 뵈지 않는 그것들이 과연 어디로 떨어질지?) 예민한 조카가 소심한 짜증을 냈다.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을까 '미안하다'는 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말은 말로 끝났다. 좁혀진 공간이 돌아오진 않았다. 남성 셋의 수다도 여성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비행기는 힘겹게 몸을 털며 고도를 높였다. 구름 위로 솟아올랐다. 구름이 노는 공중에서는 바람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다. 송송 구름들이 그저 장난을 치고 있는 듯했다. 소복소복한 구름들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나는 날고 있다.
공항 출구에서 한결같이 기다리는 돌하르방 두 분.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있을지, 제주 여행은 언제나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하르방이 쓴 모자는 모자 위에 모자를 쓴 탓인가 붉은 산타모자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멀리서부터 너무 웃겼다.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칠성로에서 점심을 먹었다. 갑자기 생각이 말이 되어 튀어 나왔다. "비행기에 달력 두고 내렸네.", "아!! 이 낯선 번호가 달력 때문이었구나. 전화를 걸었다. 공항으로 오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난감하진 않았다. 출국 직전 국제선 탑승 로비 화장실에 스마트폰을 모셔놓고 출국했다가 찾기도 했던 이력을 가진 나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정된 자리에 놓고 온 달력 정도야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쯧쯧' 친구 줄 거라고 두 개나 사놓고. 예정대로 구좌까지 갔다 레지던스로 가는 길에 잠시 들리면 된다. 내게는 총명하고 재바른 조카가 곁에 있으니까^^...
'아일랜더'에 들렀다. 감귤 젤리를 샀다. 'iiin' 겨울호도 샀다. 핑크빛 감귤 눈사람, 사람과 하르방과 동물이 함께 만드는 눈사람. '한라산 랩소디' 부제도 좋다. 이번 여행에서 '서귀다원'을 대신할 겨울 제주를 찾아야 한다. 여행은 쇼핑하는 재미니까.
바로 옆 '산지천 갤러리'로 갔다. 갤러리는 모두 4층으로 되어있다. 건물은 전체가 작은 전시 공간이고, 카페와 문화 공간이다. 오랫만에 천천히 누군가의 시간이 담긴 예술 속으로 들어갔다. 4층에는 '사진 박수, 김수남 사진전', 그는 왜 '굿' 만을 찍었을까.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서 굿이라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 척박한 환경에서 풍파를 견디며 사는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주던 문화가 '굿'으로 남았나 보다. 오로지 그것을 앵글에 담다 스스로 '박수'가 된 사진가. 전시장 한가운데 성황당 나무의 이파리처럼 어지러이 달린 사진들만이 그를 알 수 있을까?.
2층과 3층은 복개와 복원으로 태어난 지금의 산지천을 전시하고 있었다. '산지천, 복개를 걷어내고, REMOVE THE COVER' 젊은 작가들의 미디어 아트, 설치, VR 전시 중이었다. 긴 시간 땅에 묻혀 있던 녹슨 과거의 흔적들을 건져내 하나씩 하나씩 바닥에 놓고 나니 공간이 시간을 먼 과거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제 복개된 산지천에 맑은 물이 흐른다. 사람들이 찾을 만한 장소가 된 지금의 산짓물. 그 산짓물에 배를 띄우고 젊은 가수가 힙합을 부른다. '배 띄워라. 어화둥둥'이 아니라. 따라가기 벅찬 속도의 언어들 속에 가슴 아픈 사연들만 남아 있었다. 두 곡을 이어 들었다. 슬프지만 희망찬 메시지만 받아 들고 2층으로 갔다.
2층에는 미니멀리즘의 공간에 TV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설명을 읽고 보라던 그녀의 냉정한 멘트에 착한 학생이 되어 읽었다. 아이패드를 빌려 맘이 가는 대로 산지천에 산다는 풀과 벌레 들을 마구마구 늘어 놓았더니 정말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괜히 흥분했다. 기념사진까지 찍어 준 그녀는 큐레이터? 아님 작가. 물어봤어야 했는데. 제대로 고맙다고 했어야 했는데.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준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했어야 했는데. 제주 원도심, 동문시장을 찾는 육지사람들에게 산지천 갤러리는 자주 들러달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근처에 오는 일이 있으면 꼭 들를 것이다. 나는.
'산지등대'로 갔다.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사라봉을 등지고 아름다운 두 개의 하얀 등대가 서있었다. 등대의 공간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복합 문화 공간이 되었다. 바다와 등대가 보이는 지점에 '카페 물결'이 있다. 거기엔 커피와 책이 있고, 환경을 지키는 물건들도 팔고 있었다. '리모 작가'처럼 카페 물결에 앉아 등대를 그릴 수 없지만 기분만은 그가 되어 시간을 즐겼다.
구좌에 있는 '블루보틀'로 갔다. 자작나무가 정해진 모양 없이 늘어선 곳에, 갈대들이 황량한 곳에 고급진 레지던스가 있고 한편에 블루보틀이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카페 입구에 입장을 위해 늘어선 사람들. 차를 주차시키면서 발을 떼기가 엄청 어색했다. 그 속에 함께 들어가려니 모두 미쳤구나 싶었다. 블루보틀이 뭐 대단한 곳이라고 이렇게 줄까지 서서 기다리는가. 넓은 카페 안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아주 많이 묘했다.
2016년 미국 서부 여행 중, 금문교를 건너 소살리토에서 점심을 먹고 페리를 탔다. SF 항에서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던 커피가 블루보틀이었다. 기대보다 맛있던 그것이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커피임을 뒤에 알았다. 나 같은 동양인이 많았던가. 이후 도쿄에 지점이 생기고 드디어 서울에도 생겼다. 그곳도 그렇게 북적인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서울에는 몇 곳이 더 생긴 탓일까 얼마 전 다녀온 조카가 이젠 조용하다고 했다. 여행에서 갈증을 채워주던 맛이 그리워 이번 제주 여행 중 들러볼 작정이었는데. 바람도 거친 날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려서 굳이 마셔야 하나 했다.
미국의 그곳은 동네의 작은 'TO GO' 카페였는데. 기왕 구좌까지 왔고 아직 남은 시간도 많고. 관광객은 관광을 해야 하니 실내를 보고 오자고 나섰다. 휑한 장소에 건물들이 있고 구역을 나누는 듯한 돌담이 있고 사람가 차들이 많은 곳. 운치는 없지만 나름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커피 사는 일은 이미 포기했으니 사람을 피해 빙 둘러 뒤로 갔다. 유리창 너머 분주하게 드립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가 많았다. 역시 인기 장소인 것이다. 실내를 즐기러 들어갔다. 어떤 물건을 파는지 구경만 할 작정으로. 오랜만에 직접 보는 푸른색의 로고는 샌프란시스코의 푸른 햇살에 지친 내가 마셨던 그날의 아이스커피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구경만으로 돌아설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 'JUST THAT MOMENT' "MD를 사시려면 발자국에 맞추어 줄을 서주세요.", '아니, 나는 구경만~'이라 말하려고 돌아섰는데 바닥에 푸른 발자국이 보였다. 섰다. 밖에는 여전히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데. 우리는 본의 아니게 새치기를 하게 됐다. 블루보틀의 원두와 제주 한정판 우무와 콜라보했다는 '푸딩' 그리고 커피 한잔까지. 바람 부는 밖에서 애써 기다려야 사고 마실 수 있는 것들을 얼떨결에 사고 마시게 되었다. 행운인지 아님 무례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어색해 얼른 들어온 뒷 문으로 나갔다. 둘이서 얼마나 웃었던지. 어째튼 내 손에 든 봉투에는 목적이 들어있었다. 이 커피로 추억을 방울방울 내려 마실 것이다.
제주맥주와 콜라보한 배럴맥주가 있다고 들었다. 뒷문 쪽에 맥주 매장은 아주 한적했다. 금년 마지막 제주 여행의 첫날밤에 마시면 딱일 'COFFEE GOLDEN ALE'을 무려 두병이나 샀다. 그리고 예약 판매 6시간 만에 3,000병을 팔았다는 'BARREL' 도 샀다. 이 귀여운 매그넷도 기념으로 샀다. 맥주는 내 집에서 시윤과 둘이 연말을 보내며 마시기로 했다. 갑자기 즐거워졌다. 예정에 없던(?) 새치기로 얻은 싱글 오리진 커피를 마시는데 거슬릴 것 없이 황량한 구좌읍 송당리의 하늘에서 화려하게 지는 햇살이 거침없이 내 눈으로 들어왔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공항에 들러 달력을 찾아야 한다. 하하하.
세 번째 방문인 연동 센트럴 레지던스는 변함없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301호에 짐을 풀고 둘이 심각하게 저녁거리를 고민하다, '청년 다방'의 차돌 떡볶이로 결정했다. 감튀도 있어야 한다는 조카의 말에 우리에겐 'COFFEE GOLDEN ALE'이 있기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보지 못한 '옷소매 붉은 끝동'을 아이패드로 보면서 먹는 저녁은 최고였다고 하면 웃긴 결말인가. 게다가 우리에게는 우무 콜라보 '작품'인 제주 한정판 디저트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최고의 저녁이었다는 말이다^^.
'가끔은 이렇게 > I Love TR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가는 길 (0) | 2022.07.03 |
---|---|
소소한 여행의 기록 2 (0) | 2021.12.23 |
우도를 즐기다 (0) | 2021.11.27 |
우도에 머물다 (0) | 2021.11.26 |
짧은 여행 : 춘천 (0) | 2021.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