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몽화

Jeeum 2022. 12. 9. 06:51

권비영(2016). 몽화, 북폴리오.

 

2022-76

 

일제 강점기 마지막 1940년대, 일제가 극악으로 치달았던 시간을 살았던 세 명의 소녀

 

영실, 정인, 은화.

 

영실의 아버지는 토지개혁에 저항하다 모든 걸 빼앗기고 만주로 갔다. 엄마는 영실을 이모에게 맡기고 아버지를 찾겠다고 집을 나갔다. 학교를 꿈꾸었으나 근근이 국밥집을 운영하는  이모에게 얹혀살았다. 은화와 정인과 친구가 되었다. 이모는 일본인 장사꾼의 정부가 되었고 그 그늘에서 영실은 하카타의 화과자 집에 일하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만주에서 일본의 탄광으로 강제징용을 온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힘든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위안부로 끌려온 은화를 만났다. 은화와 같이 귀국하려 했으나 은화마저 사라졌다. 영실은 아버지의 죽음도 알지 못하고, 은화의 처지도 모른 채 그저 귀국하게 된다. 귀국한 영실은 아버지를 모셔오는 꿈만 꾸며 산다. 그런 시절에 인생이 뜻대로 될 리 없다. 

 

정인은 친일하는 부유한 아버지의 자식이다. 부족한 것이 없다. 엄마는 일찍 죽었다. 분홍신이라 부르는 계모는 있다. 정인은 아버지 덕에 잘 먹고 잘살지만 마음은 늘 허기지다. 은화와 정인을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허기가 차는 것 같다. 세상이 험난해지고 일본의 패망 소식이 들려오자 아버지는 오빠 정태와 정인을 프랑스로 보낸다. 다들 부러워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못하다.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정작 정인은 우울증이 깊어간다. 결혼을 하러 귀국한다. 미국으로 간다고 한다. 힘들 것도 없고 그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한다. 그러나 우울증은 더 심해지고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친구들은 소식조차 없다. 

 

은화는 기생집 화월각에서 자라는 향긋한 비누냄새가 나는 어여쁜 아이다. 그렇다고 기생은 아니다. 독립군 아버지가 죽고 엄마마저 정신줄을 놓아버린 어린 은화를 친구가 첫사랑 태선 어미에게 위탁했다. 은화는 연유를 모른 채 그저 화월각에서 산다. 또래인 정인과 영실과 친구가 되었다. 열여섯 꽃처럼 어어쁜 우정을 나눈다. 은화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삶을 꿈꾼다. 화월각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다 결국 도망친다. 우여곡절이 많다. 어린 은화는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 사람에게 속아 결국 위안부가 되었다. 꿈꾸었던 삶에서 벗어나버린 자신을 버리고자 시도하지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도망치다 실신했다. 깨어보니 영실이 보였다. 먹고살기 힘들지만 친구와 함께라는 것이 눈물 나게 고맙다.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포기한다. 상처받은 몸과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떠나는 칠복과 영실을 몰래 지켜보며 거친 하카타지만 새삼 삶에 대한 의지에 불을 지펴본다. 두렵지만 걸어보고자 한다.

 

작가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폐광을 살펴보고 한때는 지옥이었을 그곳에 무심하게 피어있는 꽃나무를 보았다고 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화사한 꽃망울이 소녀처럼 고았고 바람 불어 수북하게 떨어진 꽃송이들이 꽃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피가 나고,  절망이 넘치고, 죽음이 가득한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이 남아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이름없이 죽어간 이들과 몸은 죽지 않았으나 마음은 죽음을 겪는 위안부들이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음을 새삼 각성했다고 했다. 더 늦기 전에 잊히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살려내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들이 지켜야 할 예의라고 했다.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때의 삶을. 낱말로 문장으로 읽고 또  읽어도, 말로 듣고 또 듣거나 흐릿한 영상으로 보고 또 보아도 몸으로 겪지 못했던 그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렵고 지난하고 죽음 같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열여섯의 여자애들이 꾸었을 꿈을. 미안한 마음 가득 안고 책을 덮었다. 소설이 소설이 아닌 사실 앞에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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