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걸어서 바다를 가로지르다

Jeeum 2023. 10. 28. 11:43

박향(2020). 걸어서 들판을 가로지르다. 산지니.

 

2023-54

10/28~

 

바쁘다는 핑게로 블로그가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다. 나의 집도 같은 모습이다. 블로그도 내 얼굴이고 내 공간인데 누군가 볼까 무섭게 내가 보기에도 지저분하다. 이런 집에 누가 찾아올까. 손님이 없는 게 당연하다.

 

바쁘다고 먹고사는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일상을 지켜내는 게 쉽지 않다. 아침독서를 유지하는 것도 하루 한장 작은 그림이라도 그려내는 것도 하루 일만보를 채워 걷는 것도 모두 모두 모두. 이럴 땐 쉬어가야 하는데..... 여백이 필요한데... 이를 아주 잘 아는데... 현실은 오히려 시간을 쮜어짜길 원하고 있다. 적어도 방학이 될 때까지는 쉬어가는 것이 어렵다. 제주에서 느긋하게 보낸 시간이 너무 아득하다. 

 

신착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매우 반가웠다.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이 열흘간 했던 제주 생활이 걷기를  기반으로 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짬을 내어 제주를 다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잠시지만 작가의 글에서 지금 내게 필요한 쉼과 여유를 얻고 싶다고 생각했다. 

 

짧은 산문집이어서 토요일 일하는 사이 읽다가 일요일 아침 독서로 끝을 냈다. 아침 산책으로 시작하여 제주 서쪽 노을 보는 루틴. 천천히 걸어 애월의 바다 주변을 걷고 비양도가 보이는 한림, 협재의 바다에서 노을을 보는 열흘간의 일상이 저자에게 얼마나 큰 에너지를 주었을지...... 때문일까. 얇은 책에 차분하고 느긋하며 다정한 문장들이 많다.

 

"파도는 밀려와서 검은 바위에 부딪히고 부서졌다. 누가 파도를 부서진다고 먼저 표현한 것일까. 거대한 파도가 바위와 맞닥뜨렸을 때 최선의 방어는 어쩌면 부서짐일지도 모른다(118쪽)."

 

"길 잃을 염려도 없이 정해진 올레길을 따라 걷다가 돌아왔다. 짧은 왕복길이었지만 우리는 햇실 반짝이는 바다 어딘가에 아주 중요한 뭔가를 놔두고 온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가야만 할 것 같았다.(174쪽)" 

 

인도영화 <런치박스>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한다. 잘못 전달된 도시락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위한 용기를 내게 된다는 내용의 인상 깊은 영화였다. 우리는 어쩌면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길을 잃은 내게 엄마처럼 손을 내밀 수 있다. 상상하지 못한 설렘을 맛보고 누군가 와서 끌어 당긴다고 해도 계속 그 자리에 서있고 싶은 그런 풍경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간혹 가던 길에 쉼표를 찍고 잠시 다른 길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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