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2024). 허송세월, 나남.
2025-42
7/30 ~9/10
지극히 펑범한 사람으로 내가 나이가 들면서 간혹 가만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을 뭣이 그리 급해 안달복달하며, 넘치게 애쓰고 열심히 살아왔는지. 그땐 그래야만 사는 거라 믿었는데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잘 살았을 거란 생각이 요즘 가끔 든다. 내가 건너온 시간 속에 좀더 넓은 관점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나의 생각이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를 이 없어 보이는 김훈 소설가도 어쩌면 조금 하면서 세월을 넘어왔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다행스럽다. 부디 지금처럼 다부진 정신과 소신으로 당신을 닮은 글들을 나를 위해 당신의 독자를 위해 남겨주시길 전해본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빛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김훈
늙기의 즐거움
술은 더이상 마시지 못하고, 담배도 피우지 못하고, 산도 오르지 못해도 여전히 작가는 살고있다. 여전히 쓰면서 살고있다. 늙기를 즐기면서 살고 있다.
말년
나이를 먹으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고 뿌옇다.
슬플 때는 웃음이 나오고 기쁠 때는 눈물이 나오는데, 웃음이나 눈물이나 물량이 적어서 나오는 시늉만 한다. 안구건조증이 오면 눈이 쓰라리고 눈물이 흐르는데, 눈물이 흘러도 안구는 건조하다. 병원에 가면 눈물 흐르는 눈에 또 인공눈물을 넣으라고 한다. 눈물에 약물이 합쳐져서 눈물은 넘치는데 젖은 눈이 메마르다. (나도 눈물을 넣어야겠다) 어째서 이런지는 나도 모르고 의사도 모른다.
말을 하려다가도 말이 뜻을 저버릴 것 같아서 미덥지 못하고, 이 귀머거리들의 세상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말들은 흩어져서 할 말이 없어진다. 글을 쓰다가도 이런 쓰나마나 한 걸 뭐 하러 쓰는가 싶어서 그만둔다.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 밖에 없고 혼자서 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의 경계도 무너져서 뿌옇다. 웃음이나 울음이나 별 차이 없는데, 크게 나오지는 않고 바람만 픽 나온다.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같은 마음의 침전물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로되, 이 물컹거리고 들척지근한 단어를 차마 연필로 포획할 수가 없어서 글로 남겨 남들에게 들이밀지 못한다.
단어들도 멀어져 간다. 믿고 쓰던 단어에서 실체가 빠져나가서 단어들이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불려간다. 단어의 껍데기들이 눈보라처럼 바람에 쓸려가는 풍경은 뿌옇다. 부릴수 있는 단어는 점점 적어져서 이제 한 줌뿐인데, 나는 이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를 논리적으로 말쑥하게 연결해 놓았다고 해서 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는 불화로 긴장되어 있다. 이 아득한 거리가 보이면 늙은 것이다. 이 사이를 삶의 전압으로 채워 넣지 않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말로 건너가려다가 허당에 빠진다. 이 허당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허당에 자주 빠지는 자는 허당의 깊이를 모른다.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닌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꼐 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나와 외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거기에 썰물의 서해 같은 갯벌이 드러난다. 물도 아니도 뭍도 아닌 것이 다만 비어서 저녁노을을 받고 있다. 나는 흐려지고 희미해지고 흐리멍덩해진다. 나는 설명되거나 표현되지 않는다. 나느 시간과 공간속으로 녹고 삭는다. (37~39면)
말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 인간은 동어반복을 거듭하면서 말이 많아지는데 결국은 막다른 그곳에 갇힌다.(84면)
모든 생명은 본래 아름답고 스스로 가득 차며 스스로의 빛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이어서, 여름 호수에 연꽃이 피는 사태는 언어로써 범접할 수 없다. 일산 호수공원의 꽃들은 언어 너머에서 피어났고 여름 나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났다. 나무들은 땅에 박혀 있어도 땅에 속박되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 속에도 저러한 아름다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연꽃을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128~129면 일부)
연꽃의 흰 꽃잎에는 새벽빛 같은 푸른 기운이 서려 있어서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연꽃은 반쯤 벌어진 봉우리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거기는 너무 순수하고 은밀해서 시선을 들이대기가 민망했다. 연곷의 향기는 멀고 은은해서 사람을 찌르지 않고 연꽃의 자태는 아름답지만 사람을 유혹하지 않는다. 넓은 호수에서 연꽃은 등불처럼 피어있었다. (127면)
언제 어느 순간에 접하느냐(만나느냐, 닿는냐, 읽느냐)에 따라 마음이 닿는 문장이 달라진다. 아침 독서는 만남의 묘한 운명을 생각하게 해준다. '넓은 호수에서 연꽃은 등불처럼 피어있었다.' 쓸쓸한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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