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1997). 노을, 문학과지성사.
A5 사이즈, 345쪽의 줄간격 빽빽한 장편소설이다.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오늘은 75주년 광복절 대체휴일. 휴일이라지만 계절도 세상도 느긋하기는 어렵다. 현재 실내온도 32도. 폭염을 경고하는 재난문자가 수시로 날라들고, 이제는 끝났으면 싶은 간절한 바람도 무색하게 어제 하루 새로운 확진자 279명이라는 뉴스 때문이다.
무더위와 바이러스 경고에 오늘도 아직 한걸음 밖으로 내딪지 않고 집안에만 있다. 13층 앞뒤로 뚫린 구조의 아파트는 바람이 잘 지나간다. 앞베란다로 갈라질 듯 청청한 햇살이 바람과 함께 들어오다 북쪽 베란다의 열린 창으로 햇살은 도망가고, 시원한 바람만 실내에 남아 2시가 가까운 시간에도 아직 에어컨을 틀지 않고도 내 몸에 땀이 나지 않는다. 밀린 일을 하고 밀린 독서를 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작지만 편안한 내 공간에서 바람이 만들어주는 유리 풍경의 청명한 소리를 들으며 하는 독서는 지상 최고의 휴가법이고 바캉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든 아이스커피 한잔을 추가하면 그야말로 럭셔리 호캉스와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다.
노작가 김원일의 <노을>은 해방 후부터 작품이 처음 나온 80년대말까지 한 사람이 한가족이 겪은 삶의 이야기이다. 백정을 아버지로 둔 출판사 부장 갑수가 고향 진영에서 날아온 삼촌의 부고를 받아들고 아들 현구를 데리고 고향을 다녀온 2박 3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갑수의 시점에서 비극이라고 밖에 할 수 없던 어린 날과 그 속을 뚫고 나온 현재를 연결하며 시간으로 따지만 30여년이 넘는 세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방후 분단된 우리의 역사에서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부딪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 이데올로기는 언제난 서민의 비극을 필요로 하고 무수히 많은 개인의 삶을 의도치 않게 바꾸어버린다.
소년과 청년의 빛나야 하는 시절을 악몽에나 나올법한 일들은 겪으며 자란 우리 부모님 세대의 아픈 이야기. 그래서 누군가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누군가는 오히려 말을 떠벌리고, 누군가는 주눅들어 살고 또 누군가는 병들어 살게 만들었던 세대의 이야기.
노을을 보면 아름답게만 느끼는 사람들은 갑수가 보는 노을이 갖는 서사성이나 복잡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붉은색과 파랑이 섞이면 더욱 몽환적이지만 아름다운 보라색이 만들어지는 당연한 조화는 갑수에게는 애절한 슬픔이고 아들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고통이다.
나는 가끔 이런 책을 만나면 내가 엄마의 살을 먹고 자랐듯이 현재의 역사도 이전의 역사를 갈아먹고 진보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러나 진보의 그늘에 가려 희생할 수 밖에 없는 민초들의 삶은 어디에서 평화를 얻고 있는지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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