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코스를 모두 걸었다. 15.1Km가 그리 힘들지 않으려니 싶었는데 한 달 하고도 1주 만의 걷기 여행인지 발바닥이 아프다. 이 정도 거리에 발바닥이 아프다는 것, 그것도 무릎이나 엉덩이, 고관절이 아프지 않고 발바닥이 힘들다는 건 오늘 내가 걸어온 길에 아스팔트가 많았다는 말이다. 딱딱한 포도를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먼저 알고 신호를 보내온다.
'요조' 책방으로 유명한 '책방무사'는 올레 1코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산리'에 있다. 한적한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제주 2 공항 문제로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요조'라는 자유롭고 섬세한 여성이 제주까지 내려와 하는 서점, 그 이름이 왜 '무사'인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무사'는 '無事'였다. "별고없으셨지요?", "무탈하시지요?"의 그 무사이다. 별일도 많고, 무탈하고 안녕하게 살기 어려운 삶 속에 이 책방에서만은 누구나 '무사'한 상태이길 바라는 책방지기의 마음이 이름에서 전해져 왔다. 고맙다. 입간판에 그녀의 마음이 잘 적혀있다.
오래된 제주의 집을 그대로 살려 책방이 되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저 '아름상회'란 이름으로 스쳐 지나가기 쉬운 모양새이다. 처음 눈에 띈 것은 필름 카메라를 파는 자동판매기이다. 'Filmlog'라는 이름 아래 11개의 다양한 디자인을 한 추억의 필름 카메라가 필름 통과 같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고 아래 책방 무사의 이름도 들어있다. 하나 살까 싶었지만 내 가방에는 이미 '재주 상회'에서 보내온 필름 카메라가 들어있어 아쉬움에 눈으로만 봤다.
책방은 아주 작지만 두 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평(?) 남짓 작은 공간에 책과 소품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정성스럽게 꽂여 있고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신간들이 놓여진 매대가 있고, 그렇게 많지 않은 책들이 모두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오래된 TV와 선풍기가 무심히 놓여 있어 개인의 취향이 물씬 풍기는 책 읽는 공간이구나 싶었다.
눅눅한 여름 날, 오래된 낮은 지붕의 할머니 집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내가 한 칸의 방을 차지하고 뒹굴거린다. 선풍기는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TV를 보다 싫증이 나 책을 잔뜩 늘어놓고 읽고 있다. 소설을 읽다 시집을 보다 잡지를 보다 신문을 보다 그리곤 연필을 깎아 글을 쓰고 필사하며 놀고 있다. 마치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기념품으로 살만한 물건들, 아이들을 위한 책, 각종 포스터와 그림 등 책방주인이 대중적인 예술인임을 알아서일까. 그녀의 감성이 작은 책방에 가득했다. 이 공간에서 이 공간을 찾아 책을 고르고 읽는 사람들 모두 '무사'하기를 원하는 그녀의 마음이 이쁘다. 무사가 이름이 되기까지 어쩌면 무사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온 시간의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무사하기를 바란다.
책방'무사'의 주인의 최근 작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요조 산문을 샀다. 책의 뒷편에 적혀있다. 그녀의 마음이.
책방도 음악도 글도
내 나머지 인생 속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다 이렇게 하자.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안쪽 방에서 카운터를 보던 친절한 책방지기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해서 입구쪽 책방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안쪽 방은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다. 책방지기의 고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책방무사 옆에는 필름 카메라 현상소, 음악을 즐기는 공간, 그리고 작은 카페가 같은 마당을 쓰는 이웃이 되어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은 넉넉한 마음과 시간을 갖고 방문하면 마음도 몸도 무사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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