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허수아비춤, 2022-39

Jeeum 2022. 6. 28. 07:11

조정래(2010). 허수아비춤, 동화출판사/문학의 문학.

 

이런 대하소설은 스토리가 아니다. 스토리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애초에 정리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순간순간 전기가 흐르는 듯 짜릿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을 잘 건져내면 충분하다. <경제 민주화> 어처구니 없는 단어이다. 노작가가 만들어내는 얘기가 무척 궁금하다. 읽어보자.

 


 

장사란 50전을 보고 물밑으로 50리를 기고, 하루벌이가 미리 정해 놓은 액수에 차지 않으면 냉수로 저녁밥을 때우고 만다는 옛말도 있듯이 모든 기업인들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하나, 이익 남는 돈벌이였다(41쪽).

 

일광그룹이란 정글에서 남자(?) 강기준에게 선배(박재우)는?

 

이제 선배란 햇수의 차이일 뿐 남자 대 남자의 관계에 있을 뿐이었다.(52쪽)

 

이런 것일까? 선택받았다는 것의 의미가. 종합상사의 남자에게 명함이란? 출세의 보장. 강기준은 계열사 사장이 될 것인가?  

 

강기준은 새 명함에 선명하게 찍힌 새 직함을 응시하며 가슴이 뻐근하도록 숨을 들이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새롭게 열린 인생의 길이었다.  고지는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보다 더 거세고 굳세게 달릴 수 있는 힘이 전신에서 꿈틀꿈틀하는 것을 성욕 같은 쾌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2010년 검찰 조직, 검찰청 사람들에 대한 노작가의 표현은 이러했다.

 

검찰이란 이상한 특성을 가진 조직체였다. 상명하복 원칙과 '검사동일체' 원칙이 그것이었다. 위에서 명령하고 아래에서는 무조건 따라야 하고, 검사들은 모두 한 덩어리! 상사에 대해 충성을 다해야 하고, 검사들끼리 똘똘 뭉치는 검찰 조직은 마치 총 갖지 않은 군대나 다름없었다. 자유와 다양성과 개개인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민주주의 법을 다루는 조직이 그렇다니....... 그건 갓쓰고 골프치는 격이었고, 한복에 구멍 내 배꼽 내놓고 섹시춤 추는 꼴이었다.(217쪽)

 

여러분은 대한민국 검사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이다. 누구든지 잡아넣을 수 있고, 어느 사건이든지 수사 못할 게 없다.  검사로 임용될 때 한달간의 법무연수원 교육에서 선배 검사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말이었다.(225쪽)

 

검사들이 모두 그러한지 이렇게 일반화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러니 동네 바보가 되나보다. 시키는대로만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조직에 길들여지다보면 인지력이 아무리 좋아도 현명한, 투명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나보다. 오직 만들어지는 것은 자신들의 입맛(이익)에 충실해 지나보다.

 

일광그룹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일을 질렀다. 소설 속 일광은 '삼성'이다. 불법 탈법적인 경영권 승계에 대해 시민단체와 대학 교수가 쓴소리를 했다. 신문 사설을 통해. 사설을 실은 신문사에 대해 일광이 하는 일은 뻔하다. 광고 박탈, 파블로브의 개가 된 다른 신문사를 통해 기업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광고를 대대적으로 하고,  노예가 된 기자가 그럴싸한 CEO 인터뷰를 싣는다. 시민들은 생각한다. 경영권 승계는 당연하다고. 더불어 다른 모든 신문과 방송사들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보도 를 알아서 축소시켜 버린다.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모두 비자금의 힘이다. 미칠 노릇이다.

 

사설을 쓴 대학교수 허민은 논문의 내용부실을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또한 비자금 때문이다. 하루 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 허민. 논문에 대한 객관적 재심을 촉구하는 연명을 동료에게 부탁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외롭고 외롭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허민의 전후사정에 대해 이해하고 말을 들어주고 작은 방법 이나마 찾아주려 하는 사람은 변호사 전인욱밖엔 없다. 무료 변론이라니.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니. 죽으라는 법은 없다. 휴. 다행이라는 느낌을 안고 계속 책을 읽는다. 소설을 읽는 건지 현실보고서를 읽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150쪽 정도 남았는데 그 속에 어떤 이야기가 남았는지도 걱정스럽다. '소설을 쓰는 내내 우울했다'는 작가의 기분을 충분히 알 것 같다. 쓰면서 얼마나 애가 끓었겠는가.  

 

공평한 사회를 위한 대안은 절대 다수의 '시민'이라 한다. 시민들의 연대가 하는 감시활동이 아니고서는 대자본의 얍쌉한 행태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닌가. 배고픈 시절을 지낸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나라에서 돈, 자본, 경제, 부자되기에 쉽게 현혹되는 절대 다수의 서민들의 그 소박한 소망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소설의 결말은 허망하다. 일광그룹 문화개척센터의 핵심들은 시민활동의 주체인 변호사 전인욱을 도덕성에 흠을 내어 처버릴 시나리오를 수다떨듯 얘기하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한 일광그룹을 버리고 평가절상해줄 새로운 둥지로 자리를 옮긴 젊은 강기준은 사표를 보내온다. 같은 일들이 반복됨을 예고한다.

 

내가 여름날 몰입해 읽은 책을 덮으며, 굳이 평론을 읽고 싶지 않은 노작가의 소설이 소설같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소설이기 때문일까. 허수아비가 춤을 춘다. 누가 허수아비이고, 허수아비를 춤추게 하는자 누구인가. 누가 누구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누가 스스로 허수아비를 자처하는가. 우울하다.

 

한편 이런 소설을 누군가 써야 한다면 이를 써낼 사람은 역시 조정래같은 소설가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밀들을.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나이는 아주 조금씩 공공연한 비밀에 대해 알게하고 절망하게 하고 때론 희망하게 한다. 절망보단 희망이 많아지는 세상.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