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혜(2020). 자두, 창비.
2025년 스물일곱 번째 책
5/3~5/3
긴 글을 읽기 어려운 시간이다. 복잡한 생각을 필요한 문장에 고개를 돌리기 어려운 시절이다. 그래서일까 일단 얇은 책이 좋다. 심리적으로 부담이 없다. (읽지 못한 채) 들고 다녀도 괜찮다. 새로 생긴 서변숲도서관에서 다시 5권의 책을 빌려왔다. 조카가 슬쩍 한 권을 끼워 넣어주었다. <자두>이다.
장편과 단편이 있을 때 나는 언제나 장편을 택한다. 짧아서 섬세함이 필요한 단편보다 등장인물이 많고 서사가 많고 긴 장편이 좋다. 그게 우리네 인생을 닮았기 때문일까.
단편인 줄 알고 미뤄두었다. 보지도 않고 덮어 둔 채 오해했다. 세상이 이런 일이 너무 많다. 창비에서 선물로 받은(읽지 않은 채 꽂아둔) 책 중에 창비소설Q 시리즈 <해피엔드>가 있다는 것도 지각하지 못했다. 그저께 조카가 말하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때로 먼지를 덮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진실일 때가 있다. 자두가 단편이 아니라는 사실. 짧아 보이지만 굵직한 얘기가 담겼다는 진실. <원도>가 무거웠던 탓에 표지의 자두 3 과를 보고 괜히 얼른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경박함을 동기로 읽었다. 전부를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 오는 연휴의 첫날에 <자두>를 읽고 올여름 자두를 많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화자는 번역가 은아. 마흔살이다. 오역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책 한 권의 번역을 마쳤다. 출판사로부터 역자 후기를 요청받는다. 번역자의 글은 자신의 이야기로 대치되고, 은아의 유달리 더웠던(김일성이 죽었던) 1994년의 여름과 또 다른 여름 그리고 겨울을 거쳐 오는 동안 화자가 걸어온 길고도 따뜻했지만 냉정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화자가 말한 1994년의 여름 때문에 나의 1994년 여름이 되살아났다. 정말 더웠다. 도코로자와 오오타장 201호에는 욕실이 없었다.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내가 했던 것들. 내가 건너온 아슬아슬한 시간들이 살아났다. 나쁘진 않았다. 멀어지면 멀찍이 떨어져 보면 괜찮아 보이는 것들도 있는 법이니까. 그해 여름 김일성이 죽었다는 것이 연결되진 않았다. 가난한 유학생은 TV도 없었으니까. 아마 세상이 그의 죽음으로 떠들썩했겠으나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중요했던 내게 그의 죽음은 먼 조국의 이야기로 지나지 않았을 테니.
은아는 세진과 연애하고 결혼했다. 세진은 홀아버지가 애써 키운 하나밖에 없는 자식. 시부 병일은 공식적 학력은 없으나 인텔리의 전형인 상식적인 사람이다. 은아는 환영받고 행복이라 느끼는 시간을 보냈다. 암에 걸린 시부의 병원생활에는 누군가의 간병이 필요했고, 직접 혹은 타인에게 의지한 간병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고, 시부의 섬망 증세로 인해 어쩌면 수조로웠던 간병은 결혼의 여러가지 불합리한 정체를 들추어냈다. 그래서 은아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여름"으로 기억되었다.
시부 안병일은 가난한 집의 청년이었다. 시골에서 첫사랑 숙이와 상경했다. 숙이가 죽고 혼자 남아 자식 병일을 뒷바라지했다. 암에 걸렸다. 선망 증세가 나타나기 전까지 간병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선망은 인지력의 바닥을 말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인지력이라는 한 꺼풀을 벗겨내면 나타나는 인간의 가장 낮은 곳의 정체. 그러나 병일에게는 "한 입 배어물면 입가에 주르륵 붉은 물이 흐르던 기순네 자두"로 기억되고, 첫사랑 숙이로 기억되고, 혼자 자식을 반듯하게 키우는 동안 자신을 달래준 달콤함의 모든 것으로 기억되는 듯하다. 인지력이 벗겨지고, 행위가 비일상화되는 동안에도 남아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하다.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가장 이해받고 싶었던 가족에게 오해받는다. 세진의 자식을 낳지 않는 여자 은아를 오해한다. 여자 은아는 모든 것을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타인들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이해하지 않았다. 무자식도 시부의 죽음도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오해받았다. 결혼은 끝났다.
일은 여전히 은아의 몫이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은아에게는 일이지만 삶이다. 최선을 다해 오역이 없도록 일한다. 잔인한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다시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 세진이 보내준 돈으로 세진과 신혼여행으로 떠났던 북해도에 갔다. 둘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는 곳. 혼자였지만 더욱 생생한 곳으로 오타루가 있다. 오타루에서 은아는 간병인 영욱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닿을지 모를 편지를 썼다. 오해를 받는 와중에 말없이 이해받았던 유일한 동지. 여성 간병인 은아. 그들은 동지가 될 것인가. 친구가 될 것인가.
밋밋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치매 엄마와 9년 정도 생활하면서 겪었던 간병, 간병인들. 은아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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