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형경은 그(이)렇게 말했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노이로제 이고, 아무 것도 아닌 말에 상처 입는 게 콤플렉스 이 듯, 그 사람이 선택하는 단어가 당사자의 상처였다.’라고
몇 년 전의 독서 노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꽂힌 말이 지금껏 내 속에 박혀 있다. 순간에 박힐 만큼 강렬했다. 이후 지인들을 관찰하며(죄송스럽지만) 되풀이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작 자신의 상처라는 것을.
도서관의 반납 독촉에 밀려 방학 전 마구잡이로 빌려두고 이런저런 이유로 읽기를 미루어 둔 책을 몰아서 읽고 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작가라 말하진 않는다. 그의 소설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이다. 냉철하고 섬세한 표현에 감탄하기는 하지만 소장 가치를 느낄만한 감동적인 스토리라고 생각한 적이 크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박힌 책을 꼭 빌려 오는 이유는 그가 작가로서 나름의 세상을 잘 이루고 있다는 저간의 평가 때문이다.
하루키의 책 <작지만 아주 확실한 행복>을 휘몰아치듯 읽고 난 후, 작가의 잘난 척이 가득하기만 하다고 삐뚤어진 서평-오자 가득한 메모-를 블로그에 적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의 또 다른 책 <직업인으로의 소설가>를 읽으면서 며칠 전 내가 선택한 이 언어가 나의 콤플렉스이고 상처였음을 알았다.
소확행에서 굳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 즉, 소설을 쓰기 위한 특히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자신만의 삶의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설 쓰기에 몰입하는 시간에도, 소설을 쓰다가 생겨난 시간의 여백에도 오로지 소설이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위해 마라톤을 하고, 독서와 음악을 즐기고, 고양이를 사랑하고, 여행을 한다는 등등 그저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그저 그랬다고 얘기 하는데 그걸 듣는 내가 ‘힝! 잘난 척 하고 있네.’하며 딱 189도쯤 삐딱하게 반응한 것은 실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처음 들어간 대학을 휴학했다. 일 년 뒤,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더욱 가난해져 집안이 회복 불가능의 재정상태 라는 것을 알았다. 부친으로부터 취업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당시 인문계고 졸업의 아무런 경험이 없는 철없는 스무 살이 할 수 있는 일은 여성용 화장품 외판원이었다. 화장품이 가득 담긴 사각 가방을 들고, 제복을 입은 채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파는 일이었다. 그 일을 그냥 할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하면 내 인생이 사각가방만큼의 크기로 끝날 것 같았다.
처음으로 부모에게 거칠게 반항했다. 며칠 동안 밥을 굶으며 당시의 내가 내린 결론은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다시 공부라니 말도 안되는 결정이었다.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마치겠다는 무모였다.
더욱 어처구니없던 사실은 장학금에 의존해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선택한 것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한 번도 작가라는 것을 꿈꿔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런 생각을 왜 했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알 수 없다. 가능하다면 그 때로 돌아가 어린 나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원하는 그림대로 되지 않았고, 후기로 모교의 특수교육과를 갔고 거기서 장학금을 받으며 편안하게(?) 공부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스무 살의 가난에서 맥락없이 설정된 그 때의 좌절된 꿈과 선택은 내게 어느 정도의 가치였을까? 상처가 되고 콤플렉스가 되어 내 무의식의 깊은 곳에 남아 있을 만큼의 큰 무게였을까?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가끔 좋은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나거나 이른 아침 책을 읽고 홀로 노트에 무엇인가 적고 있는 나를 볼 때면 글을 쓰는 일에 대한 환상이 아직도 남아있나 싶다. 정말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작가가 되고 싶은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럴 만큼 글을 쓰는데 필요한 기초체력도 기술도 전혀 없다.
하지만 하루키가 소설을 쓰면서 남는 여백에 여행을 즐기고 마라톤은 한다고 했을 때 그것도 보스톤 마라톤 운운했을 때 이미 속이 비비 꼬여들기 시작해 결국에는 획-하고 삐뚤어져 버렸던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꿈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여전히 나는 그것을 꿈꾸고 있는 것인가?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아주 솔직하다. 소설에 대해 그리고 소설을 쓰기 위해 걸어온 자신의 선택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너무 담백해서 거짓이나 치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일에 대한 생각이 진솔하여 오히려 매력이 철철 넘쳐난다. 세상에 이런 소설가가 많았으면 싶어진다. 며칠 전의 일이 슬며시 미안하다.
하루키에 대고 욕을 해댔더니 며칠 만에 하루키가 위로를 준다. 작가님. 미안해요. (2020.4.12, 일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