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소깍 다리 ~ 서귀포 올레여행자센터 11.3km
출발 전 이미 비가 올 거라고 알고 있었다.
제주의 날씨는
시시각각 잘 변해서
혹시나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역시 비는 내렸다.
3월 올레6코스 걷기에는
조카 시윤과 시윤 엄마가 동행했다.
이렇게 셋이 걷는 것도 처음이다.
시윤 엄마, 나의 올케는 췌장암을 극복하고 있는 중이다.
수술해도 1년밖에 살 수 없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아픈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일이 거슬린다고, 신경 쓰인다고 하지 않을 수 있나?
그냥 함께 해보는 것이다.
이것도 내게 의미를 줄 것이다.
나를 위한 걷기이지만,
개인의 존재는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함으로......
두 사람은 아침을 잘 먹지 않았다.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나와는 다르다.
홀로 일어나 간식과 과일을 챙겼다.
<난이도 하>에 먼 길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에
11.3km를 걷자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다르다는 것을 수용하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난감하다.
오랜 습관을 어쩔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날씨가 흐렸지만 아직 비는 오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우의를 사고, 추억을 닮은 빵을 사서 요기도 했다.
181번 급행 버스를 타고
서귀포 비석거리에 내렸다.
다시 택시를 타고, 쇠소깍 다리로 갔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쇠소깍 다리는 따뜻해져 있었다.
마치 다정한 친구처럼
꽃을 잔뜩 들고서^^
5코스의 종점이자 6코스의 시작점은
서귀포 남원 효돈읍 효돈천 <쇠소깍> 다리이다.
어제 처음 산 올레 패스포트에
첫 번째 스탬프를 찍는 조카가 뿌듯해 보였다.
또 한 명의 올레꾼이 탄생했다.
천천히 걸어서라도 끝까지 가보렴.
어느덧 이십 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기 같아 보인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여전히 아기였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함께 모든 코스를 걸을 수 있기를^^
올레 리본이 햇살에 반짝인다.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리본을 따라 걷는다.
비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효돈천을 따라 벚꽃들이 활짝 피어올랐다.
시작점에 '평화올레'라는 안내가 있다.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아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어지는 평화의 올레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 아버지의 얘기가 떠올랐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제주에서 백두까지 걸어갈 날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지난달과 다르게
올레꾼도 여행자도 많아졌다.
사람으로 인한 소란스럼.
오랜만이다.
슈퍼마켓의 감귤 상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효돈>
효돈 마을 역시 여백이 많은 제주의 한적한 동네이다.
비석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오던 길이 참 좋았다.
여기라면 잠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천천히 효돈을 탐색해봐야겠다.
<쇠소깍>이다.
멀리 작은 배들이 하나 둘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서귀포 바다와 만나는 곳.
그곳에 깊이가 알 수 없는 깊은 소가 생겼다.
진한 푸른빛이 신비스럽다.
발아래 떨어진 꽃잎들이 사랑스럽다.
건물도 많고
사람도 많다.
작년 한 해 COVID 19의 틈새를 조심조심 다닐 때는
전혀 느낄 수 없던 소란함.
이런 게 여행 아니겠는가.
해변에 닿았다.
백록담의 물인지 바닷물인지 알 수 없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함께 하고,
하나가 되는 일.
알 수 없는 화학작용이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바다는 여전히 넓다.
<하효 검은 모래 해변>
한라산의 현무암 부스러기가 흘러내려와 쌓였단다.
3월의 푸른 바다와 검은 모래가 한 폭의 그림이다.
문이 닫힌 소소한 카페가 있고,
마을을 상징하는 소(COW) 상이 보이고,
배고픈 나를 자극하는 고소한 그림의 빵집도 보인다.
바닥의 문자에 달린 하트가
제주 당근을 닮았다.
풋!
오늘도 우리는 제주의 품으로 걸어 들어간다.
왼쪽으로 바다를 보며 걷는다.
잘 닦여진 길이 편안하다.
이 길의 끝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나른한 행복이 있을 것이다.
제주의 오랜 문화를 알리는 곳에는
어린 간세가 서있고,
멋진 뷰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있다.
봄은 봄이다.
지난달에 보지 못했던 초록들이
작은 꽃들을 잔뜩 달고 같이 걷는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잡풀들이^^......
제주 올레에는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구간이 있다.
올레 6코스에는 효돈의 소금막에서 보목항까지 약 2.5킬로가
바퀴가 달린 의자가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다.
아픈 나의 올케도
어른이 되는 과정에 마음이 불안한 나의 조카도
장애를 가진 이들도
아픈 이들도
누구나 걸을 수 있다.
누구나 제주를 누릴 수 있다.
더구나 제주의 재밌는 얘기가 담뿍 담긴 길이다.
놀멍, 쉬멍, 걸어가면 된다.
한걸음 한 바퀴
꼬닥꼬닥 ^^
'지금부터 송산동으로 들어갑니다.'
여기도 역시 서귀포.
익숙한 섬들의 이름들이 반갑다.
바다에 섶섬이 보인다.
풍광이 아름다운 장소에서는 누구나 카메라를 든다.
자연스럽게^^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바로
누군가에게 보낸다.
아름답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제주는 언제나 그런 마음을 갖게 한다.
<제지기 오름>으로 가는 길과 바다로 곧장 가는 갈림길에 섰다.
췌장암이라는 엄청난 병을 이기느라 애쓰는 사람의 동행자로서
기꺼이 제지기 오름에서 보는 서귀포의 풍광을 포기한다.
대신할 것은 얼마든지 넘치는 곳.
이곳은 제주이고 서귀포이다.
여기가 올레 6코스이고, 휠체어를 타는 멋쟁이들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간세도 있다.
어리석어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간세도 가끔 이렇게 늠름할 때가 있다.
왼쪽으로 섶섬을 끼고 걸어간다. 금세 보목포구이다.
보목천을 건너 마을길로 들어선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배가 고프다.
비닐하우스로 만든 쉼터에
<쉰다리>라고 적혀 있다.
시윤이 말한다.
"올레 홈피에서 <쉰다리>를 먹어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숲길로 들어섰다 싶었는데
바로 다시 바당길로 나왔다.
5킬로로 걸었다는 표지판이 나온다.
어머! 이건 뭐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법한 얼굴을 한
작은 석상들이 바다를 따라 나타난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니?
그리고
섶섬을 마주 보는 곳.
튤립 꽃이 많아도 너무 많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여행자 쉼터.
<섶섬지기>가 나타났다.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 없다.
쉼터의 옥상에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테우가 전시되어 있다.
서귀포 바다와 섶섬
우리는 또다시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구두미 포구에 닿았다.
여기가 평화올레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인다.
오렌지빛 꽃잎 모양을 닮은 나무판에 하나씩 소망을 담아,
전망대 한편에 바람막이 삼아 붙여 두었다.
평화를 바라는 이들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언젠가
한라에서 백두까지 걸어서 갈 수 있기를
다시 한번 소망한다.
<소천지 정자>를 지나
간세의 머리 방향을 따라 바라보니
숲길의 입구에 파란 리본이 보인다.
인생도 이렇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수처리장
제주대학교를 지나간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회용 비옷이라도 챙겨 다행이다.
모두 비옷을 입고 걷는다.
부디 더욱 거세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국궁장을 지나고
이제 7킬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제 완전한 바당길을 걷는다.
나는 이렇게 검은 돌들이 많은 바당길을 걷는 것이 가장 힘들다.
비 때문에 미끄러운 돌을 건너며
중심을 잡으려 애쓰니
오른쪽 무릎에 살짝 통증이 온다.
아무래도 오른쪽 무릎은 체크해봐야 할 것 같다.
돌 틈 사이로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미나리>가 잔뜩 피었다.
처음에는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미나리였다.
영화 <미나리>처럼 생명력이 무척 강하다.
누군가 잘라간 줄기에서 다시 새 잎이 나고 있다.
비는 점점 거세진다.
동행인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아침도 안 먹고 온 이들이
괜찮을 리 없다.
우겨서
<허니문 하우스>로 들어갔다.
유자차, 생강차, 감자 빵으로 지친 다리와 마음을
천천히 천천히 녹여본다.
심한 비 탓인가
실내로 몰려드는 여행자가 많다.
여기를 나서면
우리는 비와 바람과 함께
서귀포 시내까지 걸어가야 한다.
힘들면
택시 타고 바로 올레시장까지 가도 된다고 했더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두 사람 모두 올레꾼의 기질이 다분한 것이다.
하하호호
^^ 그래 기왕 걸어가기로 했으니
걸어갑시다.
비가 온다고 바람이 거칠다고 못 갈 거 없지요?
생각보다 거세진 비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걸었다.
드디어 중간 스탬프를 찍는 <소라의 성>이다.
비 때문에 스탬프 찍는 것조차 힘들다.
아무 말 없이 스탬프를 찍고 터벅터벅 걷는다
곧바로 정방폭포가 있는 <서복공원>으로 들어섰다.
정말 끝이 보인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정방폭포>까지 내려가 보는 건데
서복공원도 천천히 돌아보는 건데
아쉽다.
길을 잃었다.
<서귀진성>으로 가려면 바닷 쪽으로 가야 하는데,
바람과 씨름하는 사이에
리본을 잃고 헤매고 만다.
두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나는
일단 아는 길을 따라 이중섭 거리의 입구까지 안내했다.
드디어 리본을 다시 찾았다.
이중섭 거주지에서 잠시 쉬었다.
<이중섭 미술관>도 못 들어가 보고 그저 통과.
<서귀포 올레시장>도 비바람 탓인지 조용하다.
땅콩 만두와 오메기떡으로 요기를 했다.
흑돼지를 먹고,
김치찌개 짜글이로 밥을 먹었다.
드디어 두 사람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함께 한다는 것은 피곤하지만
이처럼 즐거운 순간도 많은 법이다.
덕분에 나도 잘 먹었다.
다시 한 코스 걸어도 될 만큼 에너지를 보충했다.
여기서 종점 <올레 여행자센터>까지
그저 가벼운 껌 씹기와 같다.
다행히 식사를 하는 동안 비도 조금 약해졌다.
<별책부록>에 들렀다.
언니가 스카프를 사주었다.
<올레여행자센터>에서 최종 스탬프를 찍고,
따뜻하고 진한 커피 한잔을 나눴다.
창밖으로 여전히
비가 내린다.
창가의 간세가 비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어서 오세요. ^6^"
"여기는 우리들의 집이랍니다."
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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