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당신의 아주 먼 섬, 2022-35

Jeeum 2022. 6. 9. 15:45

정미경 (2018). 당신의 아주 먼 섬, 문학동네.

 

정미경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작가의 유일한 유고작이라 했다. 초고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그대로라고 했다. 세심한 손길이 충분히 닿지 않아서일까. 좋았다. 작가의 문장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잔잔하지만 오래도록 내 마음에 길을 내며 흐를 것 같았다.

 

마치 무채색의 수묵화를 보듯, 파스텔톤으로만 만들어진 세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칠고 강한 바다와 그 속에 강인한 무게감으로 존재하는 섬들과 섬에 사는 사람들의 얘기인데도 그랬다. 강하다는 것은 부드러움일지도 모른다. 거친 해풍이 일면 바다풀이 저절로 눕는 것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사는 사람들은 강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강함을 드러내진 않는다. 섬사람의 삶은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답고 따뜻한 작가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소설이었다.

 

파스텔톤의 표지처럼 애초에 '섬사람'들의 삶이란 평화일 수 없다. 점점이 박힌 섬속에서도 사방을 둘러싼 아득한 섬과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일상은 말랑말랑하지 않다. 이우도, 엄마 연수도, 말썽꾼 딸 이우를 맡아주는 섬지기 정모도, 이우의 공공연히 숨겨진 아빠 태원도 그렇다. 그들과 얽혀 사는 이삐 할매도, 판도도, 태이도, 영도의 삶도.  

 

정모는 실명의 과정에서도 영도의 버려 둔 소금창고에 도서관을 만든다. 연수는 태원과 사이에서 생긴 이우를 혼자 키우며 설치 예술작업을 굳세게 살고 있다. 딸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학교를 벗어나 남자 친구 태이와 같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다. 태이는 죽고 이우만 남았다. 이우에게 태이의 아이가 생겼다. 돈 밖에 모르는 아버지 영도는 여자관계도 복잡했다. 엄마가 죽고 수많은 여자를 바꾸며 산다. 어린 태원은 방황한다. 연수를 사랑하지만 사랑은 용납되지 않는다. 딸이 태어난지도 모른다. 서커스단에서 단원으로 살다 불쌍해진 판도를 이삐 할매가 거둬 섬에서 키웠다. 자라서는 할매를 벗어나 낡고 버려진 배에 혼자 산다. 판도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정모를 도와 섬의 궂은일은 알아서 한다.

 

사고로 태이를 잃은 이우는 더욱 심하게 방황하고 엄마에게 반항한다. 감당할 수 없는 딸을 고향에 있는 친구 정모에게 맡긴다. 이우는 정모와 살며 도서관 작업을 돕는다. 섬으로 들어온 첫날 바다를 빠져 죽을 뻔하지만 판도 덕분에 살았다. 이우는 느린 듯 강인한 섬사람들의 삶을 공유하며 조금씩 성장한다. 보통의 아이로 걸어나갈 것이다. 도서관 개원 잔치를 하던 날 결국 정모는 어둠의 세계로 들어선다.


태양과 바람, 무엇보다 밀물과 썰물의 틈새에서 모서리와 껍데기들은 삭아내리고 고운 결만 남는다. 제 삶도 그러하다고. 언젠가부터 생각해왔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물아래 잠겨 파도에 쓸리는 고둥의 뼈대처럼. 여기 내려온 이후로 정모의 일상도 대개 그러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무엇보다고 하루 세끼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

 

모래언덕에 퍼질어 앉아 하늘을 올려다볼 때

삶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을 때

다정한 손길로 손바닥에 고. 마. 워라고 쓰는 그때

섬과 섬 사이에서 반짝일 당신의 아주 먼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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