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를 마쳤다. 수업이 없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스트레스 하나가 사라졌다. 다소 가벼운 마음이다. 여름이 왔다. 가뭄 끝에 비가 내렸다. 단물을 한없이 빨아들인 땅이 보드라워졌다. 바람이 몰아쳤다. 지난밤에도 그랬다.
수요일 아침 독서를 마치고 밭으로 갔다. 비바람을 맞고도 여름 햇살 덕분인지 여기저기 초록 이파리가 가득하고,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뽀시래기 3년차 텃밭 농사꾼의 눈에 주렁주렁 달린 남의 밭에 열매들이 여사로 뵈지 않는다. 저 밭의 주인의 솜씨에는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같은 토마토와 오이인데 차이가 너무 크다. 언젠가 마주치면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대접하며 그 비법을 전수받고 싶어 진다.
나의 밭은 소박하다. 그래서 좋다. 비가 내린 덕분인지 풀이 다시 잔뜩 자라있다. 입구부터 쪼그리고 앉아 풀을 파내고 캐내고 뽑는다. 청소기를 돌린 집안 마냥 풀들이 뽑혀나간 밭이 조금씩 이뻐진다. 말끔해진다. 좁은 밭에 풀들이 얼마나 많은지 햇살이 따가워 도저히 할 수 없을 때까지 풀을 뽑는다. 힘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 힘들다. 그래도 즐겁다. 머릿속을 비우기에 이만한 노동이 있을까 싶다. 열무가 더욱 크게 자랐다. 주말쯤이면 뽑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료와 나누어 열무김치를 담도록 해야겠다. 얼갈이배추도 씩씩하게 자란다. 얘들도 자라면 역시 김치가 되려나. 짧게 잘라둔 부추도 다시 자란다. 오이도 다시 세 개나 수확했다. 아기 가지가 점점 자라고 있다. 이러니 힘들다고만 할 수 있나. 눈을 들면 푸른 여름 하늘이 있고, 여기저기 초록이 풍성하고, 금호강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 텃밭에 열매가 수확마저 가득하다. 이걸 힘들다는 핑계로 멀리 할 수 없다. 힘들지만 주는 기쁨이 더욱 크다.
여름이 주는 선물. 땀이 주는 선물. 비와 바람과 햇살과 노동이 주는 선물. 그것이 내게는 텃밭이다.
친구의 권유로 심은 두송이의 로즈메리. 아파트 베란다에 심은 두 송이와는 차이가 크다. 당연히 여기 노지의 로즈메리가 키도 크고 씩씩하다. 집의 것도 옮겨 심어야 할 것 같다. 호두나무 이파리가 흔들거리며 햇살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준 덕분에 로즈메리가 더 잘 자라는 것 같다. 로즈메리 옆에 장미허브도 조금 심었다. 분꽃에 수국까지... 조만간 해바라기도 심어보려 한다. 꽃밭 옆의 텃밭. 좋지 않은가.
로즈메리 옆에도 풀이 가득하다. 그것들을 뽑아내다가 코끝으로 로즈메리가 스쳤다. 달콤한 향기. 코를 쳐박고 향기를 즐긴다. 동무도 이 때문에 로즈메리를 심으라 했겠지? 잘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밭의 토마토에 비하면 그 양도 적고, 자라는 속도는 느리지만 이렇게 달려준 것만도 넉넉히 고맙다. 내가 욕심이 기대가 너무 작은 것일까.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굳이 텃밭을 하는 이유. 내게는 단순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그렇듯 거창한 것보다 소박한 것, 화려한 것보다 심플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 아닌가?
지난주에 수확한 열무로 담은 '열무물김치'가 생각난다. 오랜만에 담근 거라 맛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남몰래 먹어보고 쾌재를 부르지 않았던가. 조카도 맛있다고 해주었고.
텃밭농사를 지어보면 '여름'은 덥고 힘든 계절이지만 그 여름이 선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인간이 살기에 딱 좋다는 봄과 가을만으로는 이렇게 풍요로운 자연의 선물을 도저히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여름은 선물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부족한 솜씨로도 땅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식물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의 풀을 정리하고, 가끔 소박한 정도의 인공 거름을 줄 수 있다면. 더운 여름 아침, 기꺼이 밭으로 나가려는 마음 정도 더해진다면. 여름은 잔뜩 선물을 짊어지고 당당하게 나타난다. 나는 그 선물을 열심히 나누고, 즐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