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나의 언어

코로나 바이러스 19

Jeeum 2020. 6. 20. 07:04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16주 만에 겨우 기말고사를 치기 위해 대학생들이 등교를 한다. 그나마도 시험만 치고 나면 다시 이별이다. 세상이 병균 때문에 바뀌고 있다. 그저 보통이라고 생각했던 일상이 아득한 날이 되었다. 참으로 별일이다.

 

비실거리고 적막했던 캠퍼스에 학생들이 북적거렸다. 마스크가 꼭 필요할 만큼 눈에 뵈지 않는 불안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학생이 있는 학교는 생기가 넘친다. 장맛비로 더운 공기가 물러난 유월의 한가운데 짙어진 구름만 한 선선한 바람이 몰려든다. 크고 작은 학생들의 움직임이 여기저기 날아서 마치 무색의 공기를 연주하듯 기분 좋은 하모니를 이룬다. 그들의 버릇없는 수군거림마저 삭막했던 공간 사이사이에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불과 일주일이지만 나의 하루하루도 같이 빠듯해지고 분주해졌다. 몸이 무겁고 피곤해졌다. 늘 이렇게 살아왔건만 이상하게 적응이 안 되고 피곤하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저녁 여섯시.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직장인의 일과란 늘 비슷하다. 억지로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 많은 정리가 되었다 싶지만 다음 날이면 또 어김없이 분주해진다. 참으로 신기한 마법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하려면 알아서 시간 관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일과 여가를 약간은 분리할 줄 아는 약간의 지혜가 필요하다. 요렇게 잘 알면서 피곤해하며 왜 일을 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바보 같아 보인다.

 

이미 어두워진 도로를 달려 귀갓길에 나선다. 먼 길의 끝에 여유를 가져다 줄 새로운 세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동차는 끝도 없이 달려간다. 가속도가 붙은 생각이 먼 거리를 이동해 작년 여름으로 간다.

 

지난 해 여름, 5일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있었다. 그 날은 할슈타트 여행을 마치고 시내에서 친구들과 시원한 맥주로 마무리하고 몰려오는 어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당시 내가 친구들과 묵었던 집은 중심가에서 트램을 타고 약 15분 정도 가야 하는 곳이었다.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잘 자크 강 가의 단정하고 품위 있는 주택이었다. 이국에서의 피곤함에 알코올 기운까지 더해져 몸도 마음도 야들야들해져 있었다. 여덟시가 훌쩍 넘어 이미 마을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다양한 지붕 아래에서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처럼 흘러나오는 연한 노랑 빛의 불빛만 가득가득 따뜻해 보였다.

 

양옆으로 집들이 이어지는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그 집이 있었다. 윗면이 양쪽으로 부드럽게 깍힌 긴 사각형의 이층 창 너머, 책들이 빼곡한 서가가 노란 불빛과 함께 지그시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잠시 올려다보았다. 서가 옆 작은 원형 테이블, 그리고 편안한 차람의 노인, 편안한 의자에 앉아 안경 쓴 노인은 홀로 독서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파스텔화의 한 장면 같았다.

 

오스트리아는 새벽부터 슈퍼마켓의 문이 열렸다. 이른 아침 장을 봐서 식사 준비가 가능했다. 그러나 오후 여섯시가 되면 슈퍼마켓은 단단히 문을 닫아 버렸다. 허둥지둥 내리는 셔터문을 넘어 물을 사러 들어갔더니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물은 사지도 못하고 쫓겨 나왔다. 편의점도 없었다. 해가 뜨면 움직이고, 해가 지면 개인적 공간이나 자신들만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눌러 앉아 버리고 싶을 만큼 자연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나라의 사람들은 일이 끝난 저녁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워지면 하던 일을 멈추었다.

 

다음 날 저녁도 비슷한 시간에 그 집 앞을 지났다. 혹시나 해서 다시 바라보았다. 전날과 같은 모습으로 같은 불빛 아래 노인은 평화롭게 여전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포근한 표정으로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노인의 저녁은 자신의 서재에서 희미한 불빛 아래 책 속의 활자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았다.

 

여행작가 손미나는 말했다. “삶을 유지하는 데는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이 필요해. 하지만 삶의 목적은 시, 아름다움, 낭만 그리고 사랑이야.”라고. 이것에 굳이 나만의 해석을 달면 일과 직장은 삶의 목적이 아니야. 그저 평화로운 삶의 수단인거야. 삶의 목적은 사랑이고 행복감을 느끼는 거야.”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날 잘츠부르크의 저녁, 연한 오렌지빛 전등 아래 독서하던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멀리 와서 여행하느라 힘들지? 일도 엄마도 소중하지만 자네만을 위한 시간도 소중한 거야. 꼭 이렇게 멀리 일상에서 도망치지 말고 너의 일상 속에서 그런 시간들을 잘 찾아봐. 사람은 누구나 바빠. 그렇다고 모두 허둥대진 않아.”

 

여행을 마치고 오랫동안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에게 있어 저녁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십대에는 저녁은커녕 밤도 아예 낮과 같았고, 삼십 대도 사십 대도 마찬가지였다. 늘 비슷한 시간 속에서 사회적으로 나는 성장했지만 늘 스트레스는 함께였다. 이것과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일상의 공간에서 정기적으로 나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분리가 필요할 때가 되면 짐을 챙겨 그저 떠나야 했다. 가끔은 떠남을 위해 일상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일상도 소중한 것이었음에도.

 

아이러니 같은 일이 생겼다. 지독한 병균인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우리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모두 자신들의 집에서 스스로를 찾아야 하는 때가 되었다. 집에는 가족이 있고 우리들이 있다. 바이러스는 긴 시간 동안 집 안에서 함께 혹은 따로 잘 지내는 현명함을 인간에게 요구하고 있다. 의도치 않았지만 우리는 바이러스 덕분에 개인적인 공간에서 아주 잘 지내야 하는 숙제를 얻게 된 셈이다. 모두가 아름답고 낭만이 넘치는 행복한 저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정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내가 바라는 저녁은 잘츠부르크 노인의 색깔과 비슷하다. 지나치게 환한 LED 불빛 보다 주황빛 연한 스탠드가 밝히는 공간에 있고 싶다. 살갗처럼 연하고 부드러운 커튼이 쳐진 공간 속에 글을 읽고 쓰고 싶다. 이제 엄마도 떠나고, 혼자다. 그렇다고 외로울 것도 없다. 누구나 외로운 거니까. 그저 나만의 따스한 색깔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묻어 나오는 공간에서 편안하고 유연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저녁인 셈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에게 슬기로운 저녁생활을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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